근대국가의 크기는 추첨제도의 폐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규모가 크고 인구 밀도가 높은 국가에서도 커다란 정치 단위로부터 적은 수의 개인을 선발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추첨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 체제의 크기와 상관없이 추첨을 통해 필요한 숫자만큼의 개인을 선발하는 것은 가능하다. 선발의 한 방법인 추첨은 실행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배심원을 구성할 때 정기적으로 추첨을 사용하는 사법제도가 있다. 따라서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추첨이 아닌 선거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 것은 아니다. 사실상 오늘날에는 추첨의 정치적 사용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추첨은 근대 사회의 정치 문화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오늘날 우리는 추첨을 괴상한 관습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우리는 추첨이 고대 아테네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비록 놀랍다는 말투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가끔 언급하기도 한다. 실제로 아테네 사람들이 이러한 절차를 채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난해한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 현대 문화의 보편적 관점을 뒤집어 보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아마도 이렇게 질문해 보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왜 우리는 추첨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일까?” (중략) 아테네 민주정은 민회(ekklesia)가 수행하지 않는 대부분의 기능을 추첨을 통해 선출된 시민들에게 위탁했다. 이 원칙은 주로 집정관(archai)들에게 적용되었다. 아테네 행정부를 구성했던 700명 가량의 행정직 중에서 600명 정도가 추첨을 통해 충원되었다. 아테네에서 제비뽑기(kleros) 방식을 통해 선임된 행정직은 대부분 협의체였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일생 동안 다른 행정직에 임명될 수는 있었지만, 동일한 직책을 한 번 이상 가질 수는 없었다. 복무시간표(이전의 직책에 대한 정산과 감사를 모두 마치기 전에 새로운 직책에 취임할 수 없다는 규정)의 존재는 실질적으로 한 사람이 어떤 행정직을 2년 연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30세 이상의 시민들(기원전 4세기에 약 2만 명 정도) 중에서 아티미아(atimia; 시민권의 박탈)라는 처벌을 받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지 행정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정치체제는 시민들이 미숙하다거나 무능력하다고 판단한 행정관의 선출을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행정관은 언제나 민회와 시민법정의 감시를 받았다. 임기가 끝나면 결산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으며, 임기 중에도 시민들이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고 직무 정지를 요구할 수 있었다. 행정관에 대한 신임을 묻는 것은 최고회의(ekklesiai kyriai)의 필수 안건이었다. 시민이면 누구나 행정관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제안할 수 있었다. 만약 행정관이 투표에서 지면 즉각적으로 업무가 정지되고 사건은 법정에 회부되어 무죄(그 이후에는 다시 업무를 재개할 수 있었다) 혹은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은 상식이었기에, 모든 시민들은 행정관이 되면 직무 결산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 탄핵될 가능성이 늘 있다는 것, 소송에서 지면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 등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점은, 행정관으로 선출되기를 원하는 사람의 이름만이 추첨기계(kleroteria)에 넣어졌다는 사실이다. 30세 이상의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추첨이 행해진 것이 아니라, 후보로 지원한 사람에 한해서만 추첨이 이루어졌다.
학/논술
- 선거와 추첨(2) 2017.09.19
- 선거와 추첨(1) 2017.09.19
- 선거 제도의 효과와 정치적 영향 2017.09.19
- 버나드 마넹. 뉴욕대(NYU) 정치학과 교수. <선거는 민주적인가>(1997) 2017.09.19
- 검찰법조일원화제도의 전제조건 2017.09.19
- 뇌사 장기 기증 선행 가족 트라우마 심각 2017.09.19
- 장기기증 하고 싶어도 ‘가족반대’ 있으면 불가능 2017.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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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와 추첨(2)
선거와 추첨(1)
(가) 선거는 자유롭고 공정한 투표를 통해 국민을 대표하여 국가를 운영할 사람을 뽑는 행위 또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은 대의 정치에서 선거는 대표자를 뽑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들은 정당이나 후보자가 제시하는 정책과 공약, 후보자의 자질 등을 판단하여 후보자를 선택하고, 이렇게 선출된 후보자는 전체 유권자의 의사에 따라 국정을 담당한다. 결국 민주 정치에서 선거는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구체적인 수단이며,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선거는 국민을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대표자는 선거를 통해 집약된 국민의 요구에 따라 사회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사회 통합에 기여한다. 이처럼 선거는 대의 민주 정치 하에서 가장 기본적인 국민의 정치 참여 수단이며, 민주 정치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이다. 이 때문에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른다. 선거는 국민 주권을 실현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나) 모든 사람은 본래 자유로우며, 그 자신의 동의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그를 지상의 권력에 복종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한 인간을 어떤 정부의 법률에 복종하는 신민(臣民)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동의의 선언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고려해보아야 한다. 보통 동의는 명시적 동의와 묵시적 동의로 구분되는데, 이것은 현재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문제와도 연관이 있다. 어느 누구도 사회에 들어가겠다는 어떤 사람의 명시적인 동의가 그를 그 사회의 완전한 구성원이자 그 정부의 신민으로 만든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려움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과 관련하여 제기된다. 무엇을 묵시적 동의로 간주하여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얼마만큼의 구속력을 가지는가? 곧 어디까지 어떤 사람이 동의를 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그럼으로써 그가 전혀 명시적 동의를 표하지 않은 정부에 대해서 어디까지 그 정부에 복종하기로 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어떤 정부 영토의 일부분을 소유하거나 향유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럼으로써 묵시적 동의를 한 셈이며, 적어도 그러한 향유를 지속하는 동안, 그 정부 하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정도로 그 정부의 법률에 복종할 의무를 진다고 말하겠다. 그러한 향유가 그와 그의 상속인을 위한 영구적인 토지 소유이건, 단지 1주일 동안 머무르는 것이건, 단순히 대로 위를 자유롭게 여행하는 것이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상 그 정부의 영토 내에 어떤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에게 복종의무가 미친다고 할 것이다.
(다) 기권, 또는 침묵하는 투표는 명확하게 의사를 표명하는 투표와 마찬가지로 합법적이며 그보다 의미가 적다고 할 수 없다. 만일 국회의원에게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거나 그에게 주어진 다양한 선택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는 투표권 행사를 보류할 수 있다. 만일 투표에 부쳐진 문제가 애매하고 불순하거나 부적절하고 불법적일 때 또는 국회의원의 권한에서 벗어날 때 기권은 필수적이며, 의무 중에 제일이며 가장 성스러운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전제정치가 눈을 부라리며 법의 전당에 부당하게 들어오거나, 의사당 문을 두드리는 반란이나 번쩍이는 총칼이 토론을 생략케 하고 입법자의 자유를 저해할 때도 기권은 필수적 의무이다. 나는 국회의원에게 적용되는 규칙이 일반 유권자에게도 적용된다고 믿는다. 만일 보편 투표권에 대한 형태와 조건과 보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거나, 유권자가 법적으로 또는 양심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투표에서 요구할 때 그는 기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