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과학 - 과학과 기술에 관한 공공참여 필립 캠벨 / 과학 전문지 <네이쳐>의 수석 편집장

 

과학 기술 정책에 공공의 참여를 유도하는 과학자들과 정부는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그들의 치명적 실수는 사회적으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문제의 사회적 합의가 깨어질 때 수면 위로 부각된다. 기후변화나 유전자 조작에 관해서든, 홍역, 볼거리, 풍진 등 영국의 3중 백신에 관해서든, 대체 과학(주류 과학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장하는 네트워크들은 무식하지도 비합리적이지도 않으면서, 과학과 과학소설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파고들어, 주류 과학자 공동체에 퍼져 있느 생각과는 전혀 다른 개념들을 퍼뜨린다. 대체 과학 네트워크들의 인식과 그들이 펼치는 논의는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이나 다른 매체들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주류 과학자들과 정부는 그러한 시민의 과학에 대응하는 방법을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정부와 과학자들이 시민들에게 과학 정책을 설명하고, 공공의 참여를 유도하는 일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그들은 논쟁의 초기에 대체 과학 네트워크들이 미치는 영향력(그들은 종종 너무 오만하리만치 상투적이다)에 대해 지금보다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나쁜 과학을 저지하고, 잘못된 상식이 불러오는 폐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과학이 위험으로 치닫고 있다 마틴 리스 / 케임브리지 대학교 천문학 및 실험철학 분야 석좌교수를 역임했고, 케임브리지 천문학 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영국 학술원 원장이며,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교 우주철학 및 천체 물리학과 교수 겸 학장이다. 천문학 분야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부루스 메달 우주론상(2001)을 수상, 당대 최고의 이론천체물리학자라 평가받고 있다. 대표적 저서로 <우리의 마지막 세기>가 있다.

 

여론 조사 결과(적어도 영국에서는)를 보면 과학을 긍정적으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과학을 통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 생각은 자기 충족적이라는 점에서 위험한 생각이다.

21세기 테크놀로지는 세계뿐만 아니라 지구 환경, 우리의 생활 방식, 인간의 본성 자체를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바꿀 것이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이전의 어떤 세대보다도 훨씬 더 큰 능력을 부여받았다. 과학은 막대한 잠재력을 제공하지만, 그 역기능 또한 엄청나다. 우리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로 재앙을 맞을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대부분의 과학적 발견은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과학적 발견은 우리의 개인적, 정치적 선택에 따라 선과 악, 그 어느 쪽으로도 이용될 수 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내리는 결정이 21세기 과학의 성과가 유용할지 파괴적일지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위험은 가장 알맞은 정책을 위해 정력적으로 운동을 하기보다는 숙명론에 빠져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데 있다. 여기에서의 숙명론은 과학은 아주 빠르게 진보하고 있으며, 상업적, 정치적 압력의 영향을 아주 강하게 받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믿음이다.

다양한 과학 활동들 가운데 어디에 물질적 자원과 인력이 배분되느냐하는 문제는 외부 요인들 사이의 복잡한 긴장의 결과이다. 그것은 순전히 지적인 측면에서 보든, 사회 복지를 고양한다는 측면에서 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연구는 줄을 잘 탄 덕에 다른 분야보다 더 많은 지원을 얻어낸다. 그러나 환경 연구, 재생 가능 에너지, 생물 다양성을 위한 연구 등은 경쟁에서 밀린다. 의학 분야에서는 열대 지방의 전염성 풍토병보다는 암과 심장 혈관 연구 같은 부유한 나라에서 주로 나타나는 병에 지원이 집중된다.

과학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느냐하는 문제는 과학자만이 아니라, 사회 각 분야의 토론을 거쳐 결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불필요한 연구와 개발을 하는 영역이 있을 수 있고, 자원과 인력이 낭비되고 있는 분야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피해야 하는 과학적인 응용도 상당히 많다.

세계 모든 과학단체가 반대하고, 모든 국가가 금지하기로 동의한 연구가 어디에선가 진행되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마약 밀매나 살인을 완벽하게 없애지 못하는 것을 보면, 과학의 오용을 막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점점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가는 현대 세계에서 상업적 압력을 규제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런 시대에 과학을 완벽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고, 강도 높은 규제 정책을 시행하더라도, 과학적으로나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은 언제 어디에선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맞든 틀리든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절망적인 비관론으로 이어지고, 안전하고 공정한 세계를 보증하고자 노력하는 의지를 꺾어버리기 때문이다. 미래는 숙명론적이지 않는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가장 잘 보호될 것이다. 그리고 이때에 과학은 가장 올바르게 이용될 기회를 맞게 된다.

 

과학은 자연에서의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 지식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존재하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학은 냉철한 객관성이 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주관적 가치판단이나 선동적이고 당위적인 명제는 발붙이기 어려운 영역이다.

반면, 정치란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굳이 말하자면 통치와 지배, 이에 대한 복종, 협력, 저항 등의 사회적 활동을 총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정치에는 다양한 가치와 당위적 판단이 혼재된다. 그리고 그런 다양성 속에서 갈등은 자연히 표출되고, 그 갈등을 토론과 합법적 투쟁으로 해결하는 과정 자체가 정치이고 민주주의인 것이다.

객관적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과 주관적 다양성이 본질인 정치는 어찌 보면 참 어울릴 수 없는 두 영역일 것 같지만, 이 시대는 이 두 영역이 함께 하길 원한다. 세계 모든 국가가 무한 경쟁 시대에 돌입한 요즘, 한 국가가 잘 먹고 살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를 선도하는 기술로 국부를 계속 창출해야 한다. 그런데 그 선도 기술의 대부분은 과학적 연구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각국의 정부는 과학을 국가적 어젠다로 설정하고 그 방향을 제시하면서 국부의 원천을 만들려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과학과 정치는 만나게 된다. 국가적 어젠다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주관적 가치판단과 과학은 이래야 한다.’는 당위가 충돌하게 된다. ‘난자와 체세포만으로 줄기세포를 배양할 수 있겠는가?’라는 순수한 과학적 탐구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난자와 체세포로 줄기세포가 배양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문제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온 국민은 무의식적으로 이에 동감하고 지지하며, 차가운 머리로 바라보아야 할 과학을 뜨거운 가슴으로 바라보게 된다. 적지 않은 수의 논문이 과학자의 실수, 또는 의도된 잘못으로 수정, 철회되는 일이 있어온 점을 감안하면, 최근 나라 전체가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로 떠들썩했던 이유는 그것이 과학의 정치화가 빚어낸 일종의 정치 스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과 정치가 만난다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 아니다. 하지만, 과학과 정치는 조심해서 만나야 한다. 국부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과학에 국가가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이 시대의 요청이며, 또 장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과학이라는 객관적인 영역과 주관적인 정치의 영역이 만날 때에는 우리에게 중용의 미학이 필요하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다. 정부가 정치적으로 과학의 영역에 들어갈 때에도 객관적으로 보호되고 중립적으로 놓아두어야 할 영역에서는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 이런 중용을 간과한다면, 황우석 사건과 유사한 혼란은 언제든지 또 생길 수 있다.

갈등 해결자'로서의 법조인의 역할과 전망에 관하여

 

2013310일 정연순(변호사)

 

1. 들어가며

 

예비 법조인을 위한 ADR 캠프 참가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강연을 요청해 주신 YMCA시민 중계실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저는 1994년부터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해서 올해 20년째 되는 해를 맞이하였습니다. 제가 이 귀한 자리에 초청이 된 것은 오늘 모인 분들이 앞으로 법조인의 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이라는 것, 저처럼 ADR(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이라는 영역에 관심이 많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조금 앞서 길을 걸은 선배로서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변호사, 또는 판검사가 되겠다는 계획 아래 구체적인 동기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적어도 정의(Justice)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는 비슷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정의의 회복이나 구현과 실제 사법현실과는 많은 괴리가 있습니다. 사법적 정의(Legal Justice)는 그 폭이 좁습니다. 재판으로 구할 수 있는 사안에도 제한이 있고, 판결은 일도양단적 해결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그 결론이 반드시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승과 패, 무죄와 유죄만으로는 채워 넣을 수 없는 수많은 문제와 답이 존재한다는 것을 변호사가 되어서 깨닫게 되었고, 아마 여기 계신 여러분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 ‘사과(Apology)’에 관한 것입니다. 갈등이 존재하고, 그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데, 한쪽에서는 사과만 받으면 된다고 합니다. 사과를 원하는 마음은 상처받은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시인해 주기를 요구하는데, 판결은 그런 마음을 달래주는 결정은 할 수가 없습니다. 1991년 헌법재판소에 의해 양심의 자유 및 인격권의 침해로 위헌결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도 여러분처럼 사법적 정의에 대한 꿈을 가지고 변호사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느낀 보람만큼 많은 회의와 절망을 느끼던 중, 2003년 직장으로부터 안식년의 기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그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생각에, ADR을 배워보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유학을 떠났습니다.

 

10년전 한국은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던 때였지만, 법원에서도 조정절차는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되던 때였습니다. 미국 미주리주립대학은 이 분야에 석사학위 과정을 둔 대학이자 ADR분야에서 수위를 다투는 실적으로 이름이 높은 곳이었는데, 제가 그 과정의 첫 한국인 학생이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국가인권위원회로 자리를 옮겨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정 제도 개선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으나 본격적으로 배운 바를 활용하지 못하였다는 아쉬움이 늘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법원에도 조정전담센터가 설치되고 몇 개의 민간단체도 만들어지는 등 이 분야는 새롭게 발전하고 있고, 많은 분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가 전문가라고 하기도 어렵지만, 그동안 배운 것과 변호사로서의 경험에 터잡아 ADR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3. 우리는 왜 ADR을 생각할까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이른바 정의(Justice)’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변호사로서의 전망과 자질에 관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모두 이 문제에 관심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야기도 두 가지 주제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4. 사법적 분쟁해결절차가 갖는 한계와 그 극복

 

분쟁, 갈등이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갈등이 없는 세상은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갈등을 최소화하고, 그 갈등의 해결을 공정하고 중립적인 제 3자에게 맡겨서 답을 구하는 일입니다.

 

가장 오래된 해결방식은 권력자, 즉 지배집단이나 1인 군주에게 구하는 것이었고, 근대 시민혁명 후에는 그 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한 것으로서 삼권분립 제도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사법부, 즉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법관들로 구성되어 법률로 보장된 절차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고 그 사회에서 합의된 바람직한 정의를 구하는 방안은 인류가 만들어낸 합리적인 해결방안이기는 하지만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당연히 짐작하거나 아는 바대로, 그 판결이 최상의 정의- 물론 그런 것이 현실에 존재하는 지에 대한 것도 가장 기본적인 의문입니다- 의 개념에 부합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양 당사자의 만족도 높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이 관계된 큰 정책적 사안에 있어서, 입법부와 행정부가 제대로 그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면 그 문제가 더 큰 사회적 갈등양상으로 번지고 결국 사법부로 떠밀려 오는데, 사법적 판단이 가지는 한계 때문에 사법부 또한 불신을 받게 되는 일이 종종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개인마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으나, 4대강 사건이나, 강정마을 해군기지 갈등과 같은 사례가 그렇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의 관념에 부합하고, 또 부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형사법 제도만 해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형사벌 체계 속에서 범죄자에 대한 정의를 구하지만, 아무리 강한 처벌을 내린다 하더라도 그 개인이나 사회가 갖는 피해가 온전히 회복되기는 어렵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라는 용어가 대두되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1). 회복적 정의는 근대 국가 이전,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국가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신앙과 영성을 통해서 모든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정의에 관한 개념인데, 고백, 회개, 용서, 호혜성, 이타적 행위, 관대함과 존중, 공동체에 대한 충성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적 권리가 강조되는 근대시민사회의 권리중심과 처벌 중심의 논리는 결국은 지속적인 불만, 책임 있는 반응의 부재, 갈등의 확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회복적 정의의 확립을 통해 평화를 구축하고 상호책임과 배려, 공동체에 다시금 결속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는 것입니다. 회복적 정의가 바로 ADR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신에 있어서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으며, 일도양단적인 해결을 내리는 판결보다는 ADR에 훨씬 친근한 개념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2007년부터 피해자- 가해자 조정 프로그램이 형사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는데,2) 그 프로그램이 목표하는 바도 역시 회복적 정의의 정신에 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 본질은 추상적이지만 구체적인 사건에서 저마다의 시각으로 인지하게 되는 정의에 대한 갈증과 불만과 달리, 매우 현실적인 요구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분쟁해결의 비용에 관한 것입니다. 사법시스템은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합의해 낼 수 있는 최종적이고 최선인 사실 확정해결 방식을 도출해 내기 위해 매우 정교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그 때문에 어느 사회이건 간에 적지 않은 비용을 쓰게 됩니다. 그 비용이 아깝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법제도에 대한 이해가 조금 부족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훈련된 법관은 그 사회의 지적 경제적 수준이 만들어낸 최정예의 산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교한 사실판단 시스템, 무죄 추정의 원칙은 단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정의의 요구에서 나온, 필연적으로 고비용을 부르는 제도입니다. 따라서 모든 분쟁은 그 사법시스템의 최소비용지출선에 맞지 않으면 법정으로 갈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고, 사건의 성격, 분쟁해결의 기간 등 여러 요인에 따라 그 한계선은 유동적이게 됩니다.

 

이번 설연휴에 층간소음으로 인해 이웃간에 살인을 하는 비극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층간 소음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그런 (경제적으로는) 작지만 내용으로 보면 심각한 분쟁들이 있습니다. 이웃 간의 주차 문제, 아이들의 학교 폭력 문제와 같은 문제들인데, 그 갈등으로 인한 피해는 심각하지만 이런 종류의 분쟁을 법원으로 가져가는 것은 만만치 않습니다. 미국은 ADR이 가장 발달한 나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요인은 바로 경제적 요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의 변호사 비용 청구 방식과 장기간의 소송절차가 ADR을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의 ADR의 발전 역사를 보면 그 축의 하나가 바로 이웃분쟁해결센터의 활동입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이웃 간에 발생한 여러 분쟁을 법원에 가기 전에 자치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지역 공동체정신을 회복하게 하고 소송비용을 줄여본다는 차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3).

 

우리나라도 도시밀집화가 거세게 이루어지면서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어떤 공동체도 형성되지 못하는 와중에 이웃 간의 관계는 날로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그 비용 때문에 소송으로 가기도 어려우며, 법원의 판결로 해결된다고 해서 그것이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어렵고, 오히려 상처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합리적인 제 3자가 우리 가까이에 있다면 우리는 층간 소음 문제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침 이와 관련해서 환경부에서는 작년부터 층간소음이웃사이센터(1661- 2642)를 운영하고 있고, 올해부터 전국으로 확대하겠다고 하는데, 사회가 복잡해지고 더욱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가 충돌할수록 사법적 정의, 그것도 훈련받은 사법관료 집단으로 이루어진, 고 비용의 판단절차가 가지는 한계는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실질적인 문제 외에, 많은 사람들이 ADR을 접하면서 갈구하고 느끼는 이상적(Ideal)'인 측면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조정과 중재와 같은 대안적 해결방식이 우리 사회, 나아가 지구사회의 창의적인 분쟁해결을 통해 사회를 바꾸고 개혁하고 좋은 공동체로 회복시킬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정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이상과 닿아 있으되 그 색깔은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정의의 여신은 저울과 칼을 들고 있으나,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굳이 온도로 따지자면 그래서 매우 차갑게 느껴지는 정의의 구현입니다. ADR 역시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지만 그것은 분쟁당사자의 자발적 해결능력을 도움으로써(empowerment), 당사자들이 상대방에 대해 관심을 가지거나 사회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능력을 키우고, 더 나아가 분쟁해결의 창의력을 높임으로 모두가 이길 수 있는 (win-win) 방식을 지향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이 갈등과 배제의 논리가 지배적인 사회를 개혁(reformative)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장 큰 규모의 ADR은 전쟁(war), 또는 무력해결방식- 매우 오래되고 전통적인 분쟁해결방식인- 의 대안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ADR발전사를 보면 변호사 중심적 분쟁해결에 지친 미국사회에서 사회복지 활동가(social work)를 중심으로 변호사가 아닌 주체에 의한 분쟁해결, 사회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주창되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미국도 그러한 개혁 정신보다는 간이해결절차로 변질되고 역시 이 분야에 있어서도 변호사들이 가장 주된 주체가 되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사법권력으로 대표되는 분쟁해결을 특정계층이 독점하지 않으며, 어려운 법률용어와 문장으로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는, 좀 더 따뜻한 정의를 꿈꾸는 하나의 방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ADR과 변호사로서의 전망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 마치 ADR이 변호사를 적대시하거나 그 생계를 위협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ADR은 송무 중심의 변호사 직역을 다양하게 하고 확대시키는 것 외에, 변호사로서의 직업적인 성가를 높이는 기술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변호사라는 직업을 떠나 인격을 높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첫째로, 변호사의 직역 확대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현대 사회는 분쟁이 더욱 다양해지고 갈등이 더욱 커져가는 사회입니다. 분쟁과 갈등이 왜 더욱 확대되어가는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회 구성원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은 확실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많은 분쟁을 마을 공동체에서 또는 친족 공동체에서 해결해 주었던 것을, 법률이나 제도, 계약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지식이 전문화되어서 법원의 판사라고 해서 보편적인 법리를 알고 있다고 하여 사건을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없는 시대가 된 지 오래입니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다문화사회로 급속히 편입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단일 민족 정서가 지배적이지만 국제결혼으로 태어난 세대가 성인이 되고 다시 그 다음세대로 이어지는 불과 십여년 후이면 우리의 삶의 양식도 달라질 것입니다. 애초부터 다민족다문화로 건국되었던 미국에서 무엇보다 법률과 계약, ADR까지도 발달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남성-주된 가치관 중심적 우리 법원이 만족적으로 해결하였다고 칭찬받을 수 있는 것은 더 줄어들지 않나 조심스럽게 예측해 봅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우리 사회는 제가 유학을 떠난 그 당시에 비해서 더욱 많은 ADR에 대한 수요와 연구, 제도의 창설이 있었습니다. 이전부터 있었던 소비자보호원의 조정제도나 상사중재 같은 대표적인 비사법적 조정중재제도 외에도 전자상거래의 온라인 조정(2000), 법원의 조정 전담센터(2009), 형사조정제도(2009), 그리고 층간소음조정센터(2012)가 새로 생겨났습니다4). 사회갈등연구소나 한국갈등해결센터와 같은 민간단체도 최근 10년 안에 설립된 단체들입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비변호사의 영리적 조정중재 화해5)를 허용하지 않고 있고, 미국에 비해 분쟁해결에 걸리는 기간이 짧고 변호사 보수가 분쟁해결기간에 연동하지 않으며, 분쟁해결비용지출에 대한 국민들의 소극적 태도가 있다는 등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과연 미국처럼 영리적 영역으로서의 ADR이 활성화될 수 있을 지 개인적으로 의문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ADR이 가지는 장점을 발굴해 내고, 법원의 소송절차로 구제되지 않는 영역에서의 갈등 분쟁을 사회적 비용을 들여서라도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아직 양자대립적 구도에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강하게 작동하지만, 신뢰받는 중립적 제 3자를 통한 사회적 갈등해결을 꾀하고 이러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공공의 영역에서 봉사할 기회와 그 지평 또한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한 영역이 반드시 사법절차와 연동되고 법률가로서 훈련을 받는 사람만을 필요로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법률적인 분쟁해결방식을 이해하고 있고 나아가 그 분야의 대안적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변호사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더 유리할 것은 분명합니다.

 

 

두 번째로, 법조인으로서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ADR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변호사가 되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판사나 검사의 업무를 본다 하더라도, 훌륭한 조정자로서의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ADR을 공부한다는 것은 협상, 조정, 중재로 대표되는 분쟁해결절차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는 기술적, 내용적인 측면에서 훈련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ADR에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갈등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원인들, 심리적 측면이나 상황적 측면 등 우리가 흔히 소송에서는 경제적 이해관계로 치환해 버리고 그렇게 취급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건들의 이면을 이해하고 다루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기술에 대해서입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읽은 책 중에 ‘difficult conversatio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도 번역이 되었는데 대화의 심리학이라는 제목입니다. 왜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원만한 대화와 소통이 어려운가를 분석하고 바람직한 대화방식에 대해 제안하고 있는 글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 대화에 대한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는데, 사실 법조인이라는 직업적 특성은 (말 또는 글로 이루어지는) ‘대화가 절대적이며, 그것은 의뢰인, 판사, 검사라는 저마다 다른 입장의 다른 처지의 상대방들과의 대화입니다.

 

흔히 농담으로 변호사의 기본은 전투력이라고들 합니다. 사건에 대한 정확한 사실분석과 검토 끝에 이를 판단자인 법관에게 최종적으로 집중적으로 설득해 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전투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분쟁해결능력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아픔과 고통,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서대로 실제로 문제가 풀려나가기도 합니다. 법정에서의 승과 패는 확률적으로 1/2로 수렴하는 것이지만, 의뢰인은 모두 만족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나에게 문제를 가져오는 의뢰인은 변호사가 [자신처럼] 문제를 보는 시각을 공유하고 [자신은 잘 모르는] 법률적인 검토를 거쳐 [자신과 함께] 창의적인 해결방식을 찾아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 그 아픔을 함께 하고 있다는 정서적 동질감을 원하기도 합니다. 경청하는 자세는 그 첫걸음입니다. 이를 잘 해내는 것이야말로 그 분쟁해결방식이 소송이건 협상이건 간에 의뢰인과의 신뢰를 두텁게 하고 승패를 떠나서 결국은 다시 그 변호사를 찾아오게 하는 비결입니다. 물론 의뢰인과 그런 이해를 공유한 끝에 분쟁에 대한 다양한 해결방식을 가지고 법정에 가는 변호사로서는 손에 쥔 카드가 많은 셈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경청의 기술과 창의적인 분쟁해결 능력은 결국은 앞서 말씀드린 정의의 이상형에 더욱 근접하는 길이고 그 변호사 개인의 인성을 풍부하게 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흔히들 변호사를 필요악 또는 법률기술자라고 경멸적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복잡한 법률의 미로를 설정해 놓고서 그 길을 인도하는 대가로 고액의 보수를 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어렵게는 생각하지만 그다지 존경하지 않는 직업으로 변호사를 꼽는 경우가 많고, 극단적으로는 없어져야 할 집단으로 매도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변호사는 개인의 재산을 지켜주는 법률 기술자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인류가 피로 쌓아 올린 인권의 헌장을 가장 전투적이고 창의적으로 해석하여 적용해 온 투사이기도 합니다. 법률의 복잡한 미로를 탐색하면서 한편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시대에 맞추어 변화하는 정의의 감각을 현장에 구현해내는 그 과정은 창의성을 요구합니다. 또한 그것은 단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삶에 대한 애정을 근본에서 요구하는 것이며, 우리가 인권변호사로 부르며 존경하는 조영래, 황인철, 유현석, 이돈명 변호사님이 모두 그런 성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변호사를 잘 하기 위해서 경청하는 자세가 좋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경륜이 오래되면 짧은 시간 안에서도 문제의 본질을 잘 깨닫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능력이 생기기도 합니다만, 변호사로서 의뢰인에게 신뢰를 얻는 길은 의뢰인의 말을 경청하고 그 사람이 무엇에 불안해하고 진정 무엇을 원하는 지에 관한 것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그러한 이해가 있어야 조정이나 중재가 가능한데, 조정자나 중재자가 필연적으로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은 품성을 요청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정과 중재를 잘하는 사람일수록 그리고 참여자의 만족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그 인격적인 측면이 빛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6). , 오로지 중립적으로 듣고 공정하게 판단하기만 하여야 하는 판사와 다른 측면이 조정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전문적인 조정자로서의 역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 친구, 나아가 크고 작은 모임이나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조직의 리더로서 품격을 키우고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를 비폭력적이며 갈등이 최소화된 평화로운 곳으로 가꾸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내 삶에 충만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이기도 합니다. 조정과 중재의 기술을 고민하고 배우는 것은 직업과 별개의 차원에서도 필요한 일이며, 이런 관점에서 우리 주위에도 많은 훈련 프로그램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한국비폭력대화센터 등에서는 일찍부터 비폭력대화방식을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을 계발, 확산시키고 있는데, 이는 전문적인 조정중재자 훈련프로그램은 아니나 그 내용이나 본질은 같다고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비폭력 대화는 기술적인 것을 배운다 하여 완성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심성을 계속 단련시키지 않으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저는 여러분이 법조인으로서의 길을 계획할 때, ‘정의를 지키는 수호자외에 소통과 이해가 깊은 조정자로서 두 가지에 모두 능한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두 가지 능력이 여러분의 직업적인 성가를 높이고, 여러분이 속한 사회를 더욱 평화롭고 정의롭게 만드는데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저를 포함해 여러분 모두가, 정말로 많은 독서와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며 기술적으로도 훈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 끊임없는 확인이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 이 프로그램이 그러한 노력으로 가는 의미 있는 출발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1) 회복적 정의에 관해서는 회복적 정의란 무엇인가, 범죄와 정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 하워드 제어 지음, 손진 옮김, 출판사 KAP

 

2) 이에 관해서는 김지선, 형사조정사건의 성립율 제고방안 연구,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총서 11-18, 2011. 을 보면 그 성과와 한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3) 위와 같은 센터가 주로 처리하는 일들은 이웃간의 분쟁, 경미한 형사사건, 고용분쟁, 노사관계불만, 교회 분쟁, 청소년들 사이의 분쟁, 토지및 경계다툼, 정책에 관한 분쟁 등이라 합니다.

 

4) 그러나 이러한 제도가 지나치게 법원의 절차를 닮았다는 것, 권위적이라는 것, 당사자의 동의나 자발적 해결을 중시하기보다는 직권적이고 간이적인 해결을 우선시한다는 것 등 아직도 보완할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5) 변호사법 제 109조에 의하면 변호사 자격이 없는 자가 금품·향응 또는 그 밖의 이익을 받거나 받을 것을 약속하고 또는 제3자에게 이를 공여하게 하거나 공여하게 할 것을 약속하고 감정·대리·중재·화해·청탁·법률상담 또는 법률 관계 문서 작성, 그 밖의 법률사무를 취급하거나 이러한 행위를 알선한 자를 처벌하고 있습니다.

 

6) 실제로 제 유학반 동료들은 모두 변호사 15년 이상의 경력자들이었는데, 이 과정을 배우면 사람이 착해진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기도 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1784)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칸트는 정신이 미성년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계몽이며, 계몽을 위해서는 용기 있게 지성을 사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과감하게 따져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칸트에 따르면, 게으르고 비겁하기 때문이다.

돈을 내면 지성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돈 만 내면, 대신 생각해주는 변호사도 있고, 요리도 방안까지 갖다 준다. 대신 기도해주는 사람도 있다. 돈 있으면 게을러도 아무 문제가 없으니, 지성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성을 사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한다. 사람들도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괜히 지성을 발휘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부모님과 선생도 위험하다고 말린다. 관습이나 형식도 지성을 사용하는 일을 방해한다. 그러나 칸트는 생각보다 그리 위험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지레 겁먹지 말고,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공적인 이성

 

계몽하려면 일단 자유가 필요하다. 그 자유는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

칸트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과 사적인 사용으로 구분한다.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공직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군대에서 상관이 눈을 치우라고 명령하면 치워야 하고, 구청에서 상관의 문서를 처리하라고 명령하면 처리해야 한다. 이런 것을 일일이 따지면, 조직 자체가 돌아가지 않으며, 시민들에게 피해를 준다. 다시 말해,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제한될 수 있다.

 

반면, ‘이성의 공적인 사용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지식인으로서 병역 의무가 갖고 있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 목사는 교회 규칙에 따라 설교를 하면서도, ‘지식인으로서 교회 제도의 개선에 대한 의견을 대중 앞에서 발표할 수 있다.

 

칸트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을 제한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럴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교회에서는 목사 설교를 듣고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하지만, 잠시 단상에 올라 사람들 앞에서 목사만 설교하는 제도는 문제가 있다. 여자도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어야 한다.(이성의 공적인 사용) 그래야 사람들이 계몽된다. 그러므로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비판 정신에 가깝다.

 

이성의 공적인 사용을 방해하는 훼방꾼은 많다. 선생은 따지지 말라고 한다.

군대는 대들지말고 훈련이나 받으라고 하고, 목사는 따지지 말고 믿으라고 설교한다.

그러나 칸트는 용기를 갖고 과감하게 이성을 사용해야 계몽이 가능하고,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해도 공공의 안전과 평화를 위협하지 않으며,

계몽을 그만두는 것은 인류의 신성한 권리를 유린하는 행위라고 단언한다.

 

칸트는 종교적인 미성숙이야말로 가장 해롭고, 창피한 일이라고 말한다.

근본주의자들이나 광신자들의 행동을 본다면, 납득할만한 얘기다.

 

전체적으로,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칸트 철학을 대변하면서도

읽기 쉬운 에세이 형태이기 때문에, 적절한 칸트 입문서로 평가 받고 있다.

 

이 에세이는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칸트 철학의 기본적인 입장을 잘 보여준다.

칸트는 우리가 원래 이성을 갖고 있는데, 이성이 완전하지는 못해서 편견이나 오류에 빠질 수 있고, 계몽을 통해 이런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이 본래 이성적인 존재라는 생각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20세기에 벌어진 수많은 참극을 돌이켜본다면,

'이성은 욕망 충족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쇼펜하우어의 반론을 생각해보게 된다.

 

칸트는 이 에세이에서 계몽 군주프리드리히 대왕을 칭송하고 있는데, ‘계몽 군주독재적 민주주의자’, ‘페미니스트 마초’, ‘좌파 신자유주의자와 같이 모순적인 말이다. 군주가 계몽되면, 군주를 때려치워야 한다.

 

그리고 '군대에서 상관이 눈을 치우라고 명령하면 치워야 하고, 구청에서 상관의 문서를 처리하라고 명령하면 처리해야 한다'는 칸트의 주장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는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던 나치 군인들과 과학자들, 공무원들, 예술가들,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떨어뜨린 장교들이 상관의 명령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국, 이 엄격한 계몽주의자도 시대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다. 사람들 앞에서 공적인 문제를 따져보는 일이 얼마나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는 각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훑어보면 알수 있다.

 

칸트는 자신의 살고 있는 18세기가 '계몽의 시대'는 맞지만, ‘계몽된 시대'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한국은 계몽된 시대인가?

/후배, 동창, 친척, 친구, 사돈, 동네 어른 등등... 줄줄이 연결되어 있는 마당에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다가는 '건방진 놈', 심지어 '패륜아'로 찍히기 쉽상이다.

뿐 만 아니다.

 

안기부와 경찰이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선교를 사칭한 용역단체가 유명 목사와 계약해 비판적인 기사, 블로그를 수색하고 명예 훼손 신고를 남발하면서 이성의 공적인 사용을 차단하고 있으니, 칸트가 희망하는 계몽은 아직도 한참 멀었다고 봐야겠다.

 

의무론적 윤리설 VS 목적론적 윤리설

 사람들은 구체적 행위에 대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도덕적 입장을 옹호할 때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의 주장을 제시한다. 첫째, 의무론적 윤리설은 바르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론으로, 어떤 도덕적 규칙에 근거해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한다. 둘째, 목적론적 윤리설은 잘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론으로, 행위가 좋거나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옹호한다. 우리들의 행위에 어떤 제약을 가하거나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행위에 대한 규범이다. 행위에 대한 규범이란 우리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기준이나 원칙이다. 이러한 행위에 대한 규범에는 관습과 도덕, 그리고 법이 있다. 관습은 특정한 사회공동체가 일반적으로 따르는 일상적 규범이다. 관습은 특정 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특수성과 상대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관습 규범의 적용은 제한적이고 우연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관습이 오랜 시간에 걸쳐 수정되어 세련된 모습으로 발전하면 그 사회의 윤리, 도덕이 된다. 윤리는 여러 가지 관습중에서 오랜 세월 동안 합리적이라고 인정받은 것들이다. 윤리는 근본적으로 내적 자율성에 근거하며 비강제적이다. 윤리는 규범의 준수와 무관하게 타당하며 유효하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으로서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근거한 외적 행위에 대한 강제 규정이다. 법은 강제 규범으로서 관습과 유사하게 사회 문화적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법은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이 있기 때문에 늘 제정과 개정의 제약을 받는다. 윤리적 문제상황의 해결과 관련하여 관습과 도덕, 그리고 법 중에서 도덕이 보다 근본적이다.

 

의무론적 윤리설

 

의무론적 윤리설은 도덕 규칙에 일치하는 행위는 옳으며 그러한 규칙에 어긋나는 행위는 그르다는 입장이다. , 의무론은 결과에 상관없이 언제나 도덕 규칙에 따라서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결국 어떤 행위의 결과가 좋으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행위가 옳기 때문에 한다는 것이 의무론적 윤리설의 핵심적 주장이다.

 

철학자 칸트는 의무론적 윤리설을 제시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의 원칙을 가언명법(자기애의 원칙)이라고 규정한다. 가언명법은 근본적으로 행위의 결과를 중시한다. 그런데 칸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에 대한 서로 다른 규정 때문에 이 원칙은 늘 주관적이고 조건적인 원칙이며, 윤리적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칸트는 도덕성의 원칙을 일차적으로 생각하고 행복의 원칙을 이차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칸트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행위의 객관적 원칙인 정언명법을 제시한다. 즉 정언명법은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행위의 내면적 동기 자체에서 도덕성을 추구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현실적 행복이나 행위의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영향력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목적론적 윤리설

 

목적론적 윤리설은 최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는 옳고 그렇지 못한 행위는 그르다는 입장이다. 목적론은 사람은 최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적론적 윤리설은 행위나 제도가 산출하는 좋은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에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목적론은 좋음에 우선성을 두고 옳음을 규정한다. 결국 행위자의 내면적 동기의 도덕성보다는 행위의 결과에 따라서 도덕적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목적론적 윤리설의 핵심이다.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은 인간의 현실적 행복 추구를 윤리적으로 이론화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들은 인간의 본질을 행복을 추구하고 불행을 멀리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따라서 행복 추구의 결과론적 원칙은 행위의 도덕적 원칙이 된다. 행위의 결과가 유용하면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고 도덕적으로 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의 결과가 유용하지 않으면 불행을 주는 것이고 도덕적으로 악이 되는 것이다. 공리주의는 행위나 제도와 관련해서 관련 당사자 모두의 행복,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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