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1784)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칸트는 정신이 미성년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계몽이며, 계몽을 위해서는 용기 있게 지성을 사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과감하게 따져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칸트에 따르면, 게으르고 비겁하기 때문이다.

돈을 내면 지성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돈 만 내면, 대신 생각해주는 변호사도 있고, 요리도 방안까지 갖다 준다. 대신 기도해주는 사람도 있다. 돈 있으면 게을러도 아무 문제가 없으니, 지성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성을 사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한다. 사람들도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괜히 지성을 발휘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부모님과 선생도 위험하다고 말린다. 관습이나 형식도 지성을 사용하는 일을 방해한다. 그러나 칸트는 생각보다 그리 위험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지레 겁먹지 말고,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공적인 이성

 

계몽하려면 일단 자유가 필요하다. 그 자유는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

칸트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과 사적인 사용으로 구분한다.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공직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군대에서 상관이 눈을 치우라고 명령하면 치워야 하고, 구청에서 상관의 문서를 처리하라고 명령하면 처리해야 한다. 이런 것을 일일이 따지면, 조직 자체가 돌아가지 않으며, 시민들에게 피해를 준다. 다시 말해,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제한될 수 있다.

 

반면, ‘이성의 공적인 사용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지식인으로서 병역 의무가 갖고 있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 목사는 교회 규칙에 따라 설교를 하면서도, ‘지식인으로서 교회 제도의 개선에 대한 의견을 대중 앞에서 발표할 수 있다.

 

칸트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을 제한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럴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교회에서는 목사 설교를 듣고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하지만, 잠시 단상에 올라 사람들 앞에서 목사만 설교하는 제도는 문제가 있다. 여자도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어야 한다.(이성의 공적인 사용) 그래야 사람들이 계몽된다. 그러므로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비판 정신에 가깝다.

 

이성의 공적인 사용을 방해하는 훼방꾼은 많다. 선생은 따지지 말라고 한다.

군대는 대들지말고 훈련이나 받으라고 하고, 목사는 따지지 말고 믿으라고 설교한다.

그러나 칸트는 용기를 갖고 과감하게 이성을 사용해야 계몽이 가능하고,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해도 공공의 안전과 평화를 위협하지 않으며,

계몽을 그만두는 것은 인류의 신성한 권리를 유린하는 행위라고 단언한다.

 

칸트는 종교적인 미성숙이야말로 가장 해롭고, 창피한 일이라고 말한다.

근본주의자들이나 광신자들의 행동을 본다면, 납득할만한 얘기다.

 

전체적으로,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칸트 철학을 대변하면서도

읽기 쉬운 에세이 형태이기 때문에, 적절한 칸트 입문서로 평가 받고 있다.

 

이 에세이는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칸트 철학의 기본적인 입장을 잘 보여준다.

칸트는 우리가 원래 이성을 갖고 있는데, 이성이 완전하지는 못해서 편견이나 오류에 빠질 수 있고, 계몽을 통해 이런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이 본래 이성적인 존재라는 생각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20세기에 벌어진 수많은 참극을 돌이켜본다면,

'이성은 욕망 충족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쇼펜하우어의 반론을 생각해보게 된다.

 

칸트는 이 에세이에서 계몽 군주프리드리히 대왕을 칭송하고 있는데, ‘계몽 군주독재적 민주주의자’, ‘페미니스트 마초’, ‘좌파 신자유주의자와 같이 모순적인 말이다. 군주가 계몽되면, 군주를 때려치워야 한다.

 

그리고 '군대에서 상관이 눈을 치우라고 명령하면 치워야 하고, 구청에서 상관의 문서를 처리하라고 명령하면 처리해야 한다'는 칸트의 주장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는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던 나치 군인들과 과학자들, 공무원들, 예술가들,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떨어뜨린 장교들이 상관의 명령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국, 이 엄격한 계몽주의자도 시대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다. 사람들 앞에서 공적인 문제를 따져보는 일이 얼마나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는 각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훑어보면 알수 있다.

 

칸트는 자신의 살고 있는 18세기가 '계몽의 시대'는 맞지만, ‘계몽된 시대'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한국은 계몽된 시대인가?

/후배, 동창, 친척, 친구, 사돈, 동네 어른 등등... 줄줄이 연결되어 있는 마당에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다가는 '건방진 놈', 심지어 '패륜아'로 찍히기 쉽상이다.

뿐 만 아니다.

 

안기부와 경찰이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선교를 사칭한 용역단체가 유명 목사와 계약해 비판적인 기사, 블로그를 수색하고 명예 훼손 신고를 남발하면서 이성의 공적인 사용을 차단하고 있으니, 칸트가 희망하는 계몽은 아직도 한참 멀었다고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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