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투표권’ 너무 경솔하다 (조선일보.2001년12월15일)
국회 정치개혁특위의 선거관계법 소위원회는 내년 6월로 예정된 지방선거에서부터 국내의 장기체류 외국인에게 지방선거의 투표권을 부여한다는데 합의했다. 국제화시대에 부응하고 특히 일본 내 동포의 참정권 확보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이 이러한 결정의 주요 배경이 됐다고 한다. 특위측은 어제부터 시작된 임시국회 회기 중에 그 입법화를 마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장기체류 외국인에게 비록 지방선거로만 한정할지라도 투표권을 준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참정권 ’허용의 문제라는 점에서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참정권은 국민의 주요한 권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한 주요 권리를 피선거권 배제 등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외국인 ’에게 부여한다는 것은 헌법개정 사안이 될 수 있으며 ‘국책(國策)’의 주요사항 변경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이 문제는 그 처리절차에서부터 신중하고 무거운 접근이 필요하며, 국민 여론의 충분한 수렴 과정 등이 사전에 있었어야 했다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러한 사안을 단지 ‘재일동포의 지방정치 참정권 획득이라는 현안 처리에 도움이 되니까 ’식으로 몇 사람이 모여 무슨 물물교환하듯 졸속 결정한다는 것은 대단히 경솔한 접근 자세이다.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오늘에 이른 재일동포의 문제와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장기체류 외국인들의 문제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느냐에서부터 재삼 숙고해야 할 일이다. 몇년동안 한국에서 일한 뒤 귀국해 버리는 대부분의 외국인 근로자에 대해 ‘참정권 ’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미국의 경우 영주권자에 대해 ‘정치헌금의 권리 ’조차 배제하는 등 선거권을 일절 부여치 않고 있고 중국도 이를 인정치 않고 있다. 반면에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는 일정한 자격을 지닌 외국인 체류자에게 선거권을 주고 있다. 우리의 문제는 사실 국내의 일반적 ‘외국인 근로자 ’들 보다는 수만명 화교들이 처한 각종 차별대우 등의 문제가 핵심이다. 이들 화교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지방선거 투표권 부여 보다는 ‘영주권 허용 ’을 통해 해결될 것으로 믿고 있다. 우리측이 이를 외면한 채 외견상 그럴듯해 보이는 지방선거 투표권 같은 데 매달리는 것은 결코 진지해 보이지 않는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탄도탄 요격미사일(ABM)제한협정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한 것은 표면상으로는 냉전종식으로 ‘공포에 의한 균형 ’전략이 근거를 상실, 러시아가 핵 운영 능력을 잃었고 대신 ‘불량국가 ’들이 탄도미사일을 보유해 틈새 선제공격이 가능해졌다는 데 기인한다.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은 미사일 방어(MD)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요격미사일 배치를 제한하는 ABM 협정 탈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속셈은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미국의 ‘21세기 전략구상 ’을 가시화하기 위한 조치로 새로운 국제질서의 태동을 예고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미국이 ABM 협정 탈퇴의 사유로 ‘불량국가들의 미사일 위협 ’을 거론했다는 사실이다. ‘불량국가 ’를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북한도 그 대상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미 ·북한관계가 경색된 가운데 북한을 염두에 두고 있는 미국의 이번 조치는 향후 남북관계 진전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이와 관련, 미국의 ABM 협정 탈퇴에 대해 러시아와 중국이 비판적인 입장을 밝히면서도 매우 절제된 표현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의 결정은 실수 ”라면서도 “러시아와 미국은 가능한 한 빨리 새로운 전략적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또 중국은 “미국이 국제사회의 의견을 진지하게 듣고 이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하기 바란다 ”며 예상보다 온건한 입장을 밝혔다.
이는 양국이 사실상 미국의 ABM 협정탈퇴 및 그와 표리(表裏)관계를 이루는 미사일 방어(MD)체계 구축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 시점에서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러시아와 중국이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미국이 주도하는 신 국제질서를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향후 남북관계의 전개도 이 같은 맥락을 전제로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불가피한 사유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이번 조치는 장기적으로 세계의 전략적 안정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의 동의를 받기 어렵다. 무엇보다 ‘9 ·11테러 ’이후 국제적인 반(反)테러 전선 구축을 위한 각국의 공조를 강조해왔던 미국이 자국의 이해와 입장만을 내세워 국제협정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는 ‘이중성 ’에 대한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또 당장은 아니더라도 미국의 MD구축이 새로운 군비경쟁을 촉발시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미국이 국제사회로부터 ABM 협정 탈퇴의 정당성을 추인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영토만이 아닌 세계의 안정을 보장할 수 있는 후속조치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