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외국인에게 투표권을" (한겨레21 20000324)

 

프랑스인들 과반수 넘는 찬성에도 우파세력 반발대상국 차별도 논란거리

 

프랑스에서는 내년에 예정된 시장과 시의회선거를 앞두고 외국인에게 투표할 권리를 주는 문제를 놓고 찬반 논쟁이 치열하다. 외국인 참정권 부여 문제는 1981년 대통령선거 당시 미테랑 후보의 110개 공약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 뒤 20년이 흐르도록 프랑스 좌·우파는 이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놓고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투표권

부여를 근본적으로 반대한다는 입장과, 모든 외국인에게 그 권리를 줘야 한다는 견해로 정치권이 극명하게 나뉘고 있다.

 

2001년부터 과연 할 수 있을까

 

유럽의 정치·경제적 통합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 92년 조인된 마스트리히트 조약 제8항은 "유럽연합 회원국의 국적을 가진 모든 사람은 연합의 시민이기도 하므로 체류하는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 투표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에 대해서는 특히 프랑스, 독일 등의 나라에서 반발이 심했다. 이는 각 나라가 규정하는 '시민''국민'의 개념이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 나라들과는 달리 63년 아일랜드를 시작으로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유럽나라의 절반 가량이 이미 이 권리를 인정하고 있어 프랑스도 이제 더이상 이 문제를 비켜갈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됐다.

 

결국 프랑스는 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자국 내에 거주하는 유럽연합 회원국의 시민들에게 2001년에 치러질 지역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권리마저도 일부 국가를 제외시켜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즉 영국, 독일, 이탈리아 사람들은 투표할 수 있어도 캐나다, 모로코 등 다른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경우 프랑스에서 1020년 넘게 살아왔다고 해도 투표권을 주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들 외국인들은 "프랑스 정부와 지역에 각종 세금을 제때 납부하고, 지역사회의 경제발전에 기여하면서도 참정권을 얻지 못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학교, 회사, 노사분쟁조정위원회, 의료보험의 행정의회, 공공 장기임대주택기구 등에서 치러지는 선거에는 참여할 수 있으면서도 그 전체를 관리하는 시장을 스스로 뽑을 수 없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비난한다.

 

그나마 유럽연합 회원 국민들에게 주기로 한 투표권도 제대로 행사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실제 극우파정당인 '프랑스를 위한 연합'(RPF)의 차기 대통령 후보 샤를르 파스콰는 "시민의 자격은 국적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투표권은 시민권의 하나이므로 프랑스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그것을 부여할 수 없다"고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합의 사항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발언을 했다. 그가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우파를 지지하는 유권자의 63%가 여전히 외국인의 참정권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다수의 좌파세력들은 외국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당의 기본 방침을 재확인하면서도 그 실현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우파내부에서도 외국인에게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사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질 드 로비앙 아미앵 시장은 중도우파정당인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위한 연합'(UDF)의 공식적 입장에 반기를 든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7%에 이르는 외국인이 체류하는 아미앵시 시장으로서의 경험에 비춰볼 때, 외국인이 프랑스사회에 통합하는 과정은 참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해 우파내부에서도 이 문제를 둘러싼 이견이 있음을 드러냈다. 또 불법 체류자들을 강제 추방하는 등 평소 외국인 문제에 대한 강경방침으로 반발을 샀던 장 피에르 슈벤망 내무부 장관도 이민자들의 투표권에 대해 "고려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전향적인 견해를 밝혔다. 이는 소속 정당인 '시민운동'(MDC)의 공식견해와 정면 배치되는 것이기도 해 국민들을 더욱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우파 내부에서 의견이 엇갈리기도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프랑스인의 52%가 지역선거에서 외국인에게 투표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올해 처음으로 찬성자 수가 과반수를 넘긴 것이다. 이는 경제가 되살아나면서 실업률이 크게 떨어지고 있고, 이에 따라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정이 누그러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좌파세력은 이러한 분위기가 "모든 외국인에게 투표권을!"이라는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파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 프랑스에 체류하는 모든 외국인들이 당당히 투표권을 행사하는 날은 멀고도 험난하게만 보인다.

파리=신순예 통신원

soonye.sin@libertysurf.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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