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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가 본 공론장의 역사와 문제점, 대안 2015.06.10.

 

<공론장의 역사>

 

1. 군주제 하의 과시적 공론장

 

- 군주가 지식인들을 불러서 연구, 공연 등을 시킨다. 이는 문화나 학문의 발전을 위함이 아니라 군주, 소수자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함이다.

 

- 오픈되어 있지 않다. 비민주적.

 

2. 부르주아지(문예적, 사적인) 공론장 18세기 전반

 

- 부르주아 공론장의 맹아를 하버마스는 17세기 후반 영국으로 잡고 있다. 하버마스는 살롱을 민주적 토론이 융성했던 공론장의 모범으로 평가한다.- why? 폐쇄적인 구조를 무너뜨린 힘 때문이다. 성역 없는 토론, 계급장을 뗀 토론이 가능했다.

 

[공론장의 구조변동] 참고

cf) "1680년과 1730년 사이에 번성했던 커피하우스와 섭정 시기와 혁명 사이 기간의 살롱이다. 이것은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처음에는 문예적 비판의 중심지였으며 후에는 정치적 비판의 중심지가 된다. 여기서 귀족주의적 사교계와 부르주아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교양층의 평형이 형성되기 시작했다."(102)

"18세기의 위대한 문필가들 중 먼저 이러한 담론으로, 즉 아카데미에서의 강연과 무엇보다도 살롱에서의 담론으로 먼저 자신의 기본 생각을 토론에 부치지 않았던 사람은 거의 없다(105)”

 

문화를 상품 형태로 전화시킴으로써 문화를 비로소 토론능력을 갖춘 문화로 만들어낸 동일한 과정이 공중의 원칙적 비폐쇄성을 가져온다." (107~108)

 

- 상공업의 발전과 더불어서 신흥 귀족층이 참여하여 자유로운 문예비평과 시사토론을 하는 사교모임과 살롱의 형태로 진화하게 된다. 살롱은 문예 토론의 중심지였다.

 

- 공적인 영역은 군주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사적인 영역으로 공론장이 형성된다. 자신들만의 영역을 만들기 위함이다.

 

- 소수 자산가들에 의한 공론장이다. 자신들의 영역을 만들기 위한 공론장으로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주로 자유를 외치는 소수 엘리트 자유주의자들)

 

3. 대중적 공론장 18세기 후반

 

- 정치적 관심의 확대와 함께 대중의 공론장이 등장.

 

- 자유를 누리던 소수의 엘리트만의 공론장이 아님. 부르주아지의 자유주의적 공론장과 다른 민주주의적 공론장이다. 평등을 중시!

 

- 공론장이 공적인 영역에 등장한다. 대중들이 공론장 안으로 들어온다.

 

- 모두가 평등하게 자유롭다! 그러면서 서로를 제약한다.

 

- 여론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길 갈망하는 공중의 비판적 담론으로 성격이 굳어지면서 국가가 사회의 요구와 교감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었다.

 

4. 과시적 공론장의 왜곡 = 공론장의 재 봉건화.

 

- 체계의 합리성만을 홍보하는 과시적 공론장이 돌아온다.

 

- 사람들은 보편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이미 시스템 하에 지배당하고 있다. 전혀 대중들이 체계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 목적에 대한 합의가 없다.

 

- 체계(관료적으로 운영되는 국가, 기업, 학교의 영역)의 논리가 지배하고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목적에 대한 합의가 없다.

 

- 공론장이 홍보활동으로 조형됨에 따라 재 봉건화됨. 하버마스는 국가 간섭과 신문의 상업화 그리고 그것이 불러온 공론장의 재봉건화를 한마디로 대중 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는 표면상으로만 공론장이다.1962”

 

1. 4번 공론장의 위기는 다르다. 세 번째에서 네 번째로 가는 과정에서 변화한 것. 한편에서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자체에도 문제가 있고, 이것이 공론장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 모든 사람들에게 언론에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러면 왜 공론장이 왜곡이 됐는가?를 보아야한다.

 

하버마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공론장의 구조적 변화이다. 근대 시민사회의 발전과 함께 공론장이 재봉건화 되면서 사회적 개인들이 비판적 청중 역할을 상실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공론장은 본래 이기주의나 개인주의에 대항해서 모든 사람들이 차별 없이 접근 가능한 공동의 공간을 이상적인 이념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공론장에서 정상적인 시민이라고 간주되는 특정한 집단이 정의의 당사자로 상정되고, 이들이 말하는 공공성은 그 밖의 다른 주체들을 억압하거나 배제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대안>

 

: ‘공개성의 재확립’ - 사적 영역의 이익집단, 정당의 결정 과정에서의 투명성을 재고. 모든 과정이 공개성이라는 기준 위에서 다뤄줘야 한다. 전시적 공공성이 진정한 공론의 기반이 될 수 있다.

 

: 진리의 합의모델이 중요하다. 진리의 합의 모델이란 상대주의로 가는 것이 아니다. 상대주의로 가면 히틀러도 합리화 될 수 있다. 교육, 제도상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 실제 삶속에서 나에게 진리가 되어야 진정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문제에 이름을 붙여주어야 한다. ex) 성차별!. / 공간을 만들고 / 조직을 통해서 정치적 조치가 가능해야한다.

 

참고문헌 : [공론장의 구조변동 : 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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