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민간인 사찰 의혹, ‘저강도 공포정치의 서막

 

주간경향 2015.08.11.

 

 

고강도 공포정치가 국민들에게 겁을 주는 통치기술이라면, 저강도 공포정치는 국민들의 기를 죽이는 통치기술이다. 자신이 공권력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리적 위축감을 느껴 기가 죽은 국민은 정치적 의사 표현과 행동에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프라이버시는 죽었어. 살아 있는 유일한 프라이버시는 자네의 두뇌 속에만 존재해.”

 

1998년에 개봉한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이렇게 21세기에 다가올 프라이버시의 종언을 예견했다. 영화 속 카메라 앵글은 국가 정보기관이 동원한 온갖 최첨단 원격 감시시스템의 촘촘한 그물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주인공 윌 스미스의 고군분투를 시종일관 따라다닌다. 하지만 긴장감 넘치는 이 장면들을 보면서도 그때 나는 이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이야기일 뿐이야라며 꽤나 안이한 생각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2013, 미국 정보기관의 컴퓨터 기술자였던 에드워드 스노든은 미국 내 민간인과 다른 나라 주요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광범한 원격 감시가 이뤄져 왔음을 폭로해 온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의 모습이 더 이상 영화가 아닌 엄연한 현실이 돼버렸음이 입증된 순간이다. 하지만 이걸 보면서도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것은 그저 다른 나라 이야기일 뿐이야. 설령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건 일부 정치인이나 사회운동가들의 문제이지 나처럼 평범한 시민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라며 여전히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안이한 착각은 불과 1년 만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지난해 검찰의 카카오톡 모니터링 방침 발표는 평범한 시민 누구라도 자신의 사적인 대화 내용이 언제든 국가권력의 사찰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새삼 일깨워준 계기로 작용했다. 이후 외국산 메신저인 텔레그램으로의 대규모 사이버 망명에서부터 카카오톡의 보안서비스 강화조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꽤나 큰 소동을 겪었다. 하지만 이 소동이 고작 전초전에 불과했음을 다시 확인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근 터져나온 국정원 해킹 의혹 사건은 민간인 사찰이 단지 우려가 아니라 이미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의 주인공이 어쩌면 바로 나 혹은 당신일 수도 있다는 불안을 자아내며 우리 사회에 큰 파문을 몰고 왔다.

 

 

영화 속 주인공은 어쩌면 당신 혹은 나

정부의 어설픈 해명이 또 다른 의혹을 낳고, 여야 간에 연일 날선 정치적 공방이 몇 주째 계속되고 있는 이 미궁의 사건 속에서 과연 무엇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실체인지는 아직 섣불리 속단하기 이르다. 국정원 직원의 갑작스러운 자살을 둘러싼 미스터리, 국정원이 사용했다는 국내 IP의 용도, 로그 파일 원본에 담긴 내용, 그리고 가장 중요한 민간인 사찰 여부 등 많은 쟁점들 중 어느 하나도 아직 속 시원히 풀릴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분명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저강도 공포정치의 그림자가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저강도 공포정치란 지난 독재정권 시절에 자행됐던 강도 높은 공포정치와는 형태를 달리하는 새로운 방식의 공포정치를 지칭하기 위해 필자가 고안한 개념이다. 이는 베트남 전쟁의 실패 이후 미국이 제3세계 전략으로 새롭게 채택한 저강도 전쟁으로부터 따온 개념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처럼 미국이 제3세계 국가에 직접 군사력을 투입해 무력충돌을 감행하는 대외전략을 고강도 전쟁이라 한다면, 저강도 전쟁은 제3세계 국가 내부에 테러·폭동·게릴라전 등을 지원하여 분열과 갈등, 그리고 불안감을 조장시키는 전략이다. 많은 국제정치 학자들은 1980년대 이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중동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는 정치적 혼란의 배후로 주저 없이 저강도 전쟁을 지목해 왔다.

 

이 개념을 한국의 정치상황에 차용해 본다면 과거 박정희·전두환 시절의 공포정치는 공권력의 강압적이고 물리적인 행사를 통해 노골적으로 시민의 공포감을 조장하는 고강도 공포정치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저강도 공포정치는 보다 은밀하게,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공권력의 존재감을 인식시킴으로써 시민들로 하여금 심리적 위축감을 갖게 만든다. 절차적 민주화가 달성되고, 온라인을 통한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활성화된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국가권력이 사악한 의도를 품었을 때 채택하기 딱 좋은 통치기술이 바로 저강도 공포정치라 하겠다.

 

권력에 대한 눈치보기와 자발적 복종

고강도 공포정치와 저강도 공포정치라는 통치기술은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마이클 무어의 작품 <식코>에서 등장했던 다음의 유명한 대사와도 맥을 같이한다. “국가권력이 국민을 길들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겁을 주거나, 기를 죽이거나.” 고강도 공포정치가 국민들에게 겁을 주는 통치기술이라면, 저강도 공포정치는 국민들의 기를 죽이는 통치기술이다. 자신이 공권력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리적 위축감을 느껴 기가 죽은 국민은 정치적 의사 표현과 행동에 자기검열을 하게 되고, 이는 곧 권력에 대한 눈치 보기와 자발적 복종으로 이어지면서 저강도 공포정치가 완성된다.

 

따라서 저강도 공포정치 상황에서는 국정원의 해킹 프로그램을 통한 민간인 사찰이 실제로 있었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당신과 나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우리 모두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어 버렸다는 점, 그래서 개인보다 월등히 힘이 센 국가권력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지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결국 거센 국민적 비판여론에도 불구하고 국정원과 국가권력은 이미 해킹 프로그램 구매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혹자는 이것이 국익을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라고 국정원을 옹호한다. 자신이 아무 잘못한 것 없이 떳떳하다면 남이 스마트폰 좀 들여다보는 것이 무슨 큰일이겠냐며 심드렁하게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국가는 어디까지나 국민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헌법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엄연히 명시하고 있다.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의 사자후처럼 국가란 국민인 것이다. 국가 주권의 주체인 대다수 국민들에게 감시의 공포감을 조장하면서까지 기어코 지켜내야 할 국익이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익일까? 그리고 국민의 기본권인 프라이버시와 표현의 자유를 굳이 침해해야만 유지 가능한 국가라면 과연 그 국가는 존속할 가치가 있는 제대로 된 국가일까? 이 시점에서 근본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민경배(경희사이버대학교 모바일융합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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