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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된 불신과 공포가 원인이라니 해결책은 더 난망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저축은행발 예금 대량인출 사태(뱅크런)은 가까스로 진정됐지만 그 원인과 책임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뜨겁다. 뱅크런이 단지 저축은행 예금자들만의 문제였을까. 예금고객이나 금융당국은 물론 대다수 국민까지 불안하게 한 저축은행발 뱅크런의 실체는 무엇이며 뱅크런이 야기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자유은행제도로부터 시작된 은행제도는 기본적으로 뱅크런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초기 자유은행제도 하에서 은행들이 적정 수준의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해 도산하는 사례가 빈발함에 따러 금융질서가 문란해지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중앙은행의 법정 준비제도와 예금자보호제도를 통해 은행의 유동성에 대한 공중의 신뢰를 제고시켜 왔다.

 

중앙은행의 법정지급준비제도와 예금보호제도라는 이중적 통제 장치를 통해 은행의 유동성에 대한 신뢰도를 제고함에 따라 뱅크런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은행과 고객은 뱅크런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기본적으로 고객이 맡긴 예금 중 일정 비율의 돈(지급준비금)만 남기고 나머지는 대출해주기 때문에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돈을 찾겠다고 몰려갈 경우 언제든지 뱅크런이 벌어질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럴 확률이 그저 낮을 뿐이다.

 

그래서 이중의 안전장치로 예금한 돈을 혹시나 못 찾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정부는 금융회사(결국은 고객)들이 낸 보험료를 모아 예금보험기금을 조성한다. 예금자보호제도는 만약의 예금인출사태가 벌어져도 일정 수준까지는 정부가 책임지고 돈을 내주겠다는 일종의 안전망인 셈이다.

 

이처럼 예금자들을 안심시키고 신뢰도도 높이는 수단인 지급준비제도와 예금자보호제도가 있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었음에도 이 같은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극단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이번 저축은행 뱅크런이 일어난 것이다.

 

정부는 저축은행들이 처한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예금보험기금 공동계정 설치, 공적자금을 통한 구조조정 기금 조성, 4대 금융지주의 2조원 신용공여 방안 등 다각적 대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과도한 예금 인출만 없었더라면 정부의 회생 프로그램대로 저축은행이 위기를 벗어나고 예금자들도 손해를 감수하면서 적금을 해약할 필요가 없었다고 정부는 안타까워한다.

 

삼화저축은행 영업정지 직전인 지난달 10일 금융위원회의 한 공무원은 "외환위기 당시 정부는 종합금융사라는 업종 자체를 정리해버린 경험이 있다. 이번 저축은행의 뱅크런 사태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저축은행 예금자들이 일거에 창구로 몰려들어 집단적 분노와 공포에 휘말리는 사태다. 성난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돌이라도 던져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국가 경제에 파국이 오고 말 것이다. 정말 두려운 것은 공포의 무차별 확산"이라고 말했다.

 

극단적 가정인 듯하지만 '통제를 벗어난 비이성적 집단행동'이라는 뱅크런의 단면을 언급한 것이다. 개인으로선 이성에 기초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몰라도 이것이 집단화되면서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그 유명한 '뱅크런의 역설'(이를 '구성의 오류'라고도 함)이 현실로 등장한 것이다.

 

일부 예금자들이 기회비용을 치르면서까지 맡겨놓은 돈을 찾으려 몰려들었고, 정부의 대책을 신뢰하던 사람들에게까지 불신과 공포를 전파하면서 너도 나도 예금 인출에 나서는 집단행동으로 발전하여 뱅크런이 터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정부의 생각이고, 정부의 대책을 신뢰하던 사람들에게까지 불신과 공포를 전파해서 뱅크런으로 이끈 것이 누구이며, 사태의 발단이 과연 무엇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어쩜 정부 스스로 자초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행태경제학의 관점이다.

 

이처럼 불신이 공포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는 메카니즘을 인간의 경제적 선택과 연결시켜 새로운 각도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 최근 행태경제학의 주요 관심사다. "예금을 인출하려고 노던록은행 앞에 줄을 섰던 사람 중 다수는 정말로 은행이 파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군중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맹목적으로 따라갔다"고 니컬러스 크리스타키스 하버드대 의대 교수는 2007년 노던록은행의 뱅크런 사태를 분석했다('행복은 전염된다' 중에서).

 

비이성적인 집단행동이 뱅크런 사태를 야기했다는 얘기다. 크리스타키스 교수는 "소셜네트워크는 맨 처음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작용하기 때문에 (친구들이 그러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예금을 인출하기로 결정한 부부처럼)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한 사람의 행동이 친구에게 영향을 주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에게 순차적으로 영향을 계속 준다는 광대한 소셜네트워크(사회연결망)에 주목했다.

 

"방송에서 저축은행이 문을 닫는다는 얘길 듣고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왔는데, 수백 명이 길게 줄을 서 있어서 큰일이 났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말한 부산저축은행 앞에서 장사진을 쳤던 예금자 중 한 사람의 말에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저 궁금해서(?) 현장에 갔던 그는 예금을 찾기로 결심한 것이다. 은행 직원의 설명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 인간의 '도마뱀 뇌'와 같은 구조가 비이성적 행동을 낳는다고 설명했던 테리 번햄 전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의 설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사회는 훨씬 복잡해졌는데, 인류가 수렵이나 채집을 하던 시대의 뇌(도마뱀 뇌)로 대응하고 있기 때문에 이성적 행동보다는 불안이나 공포, 탐욕과 같은 요인들이 인간 행동을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그러나 뱅크런의 가장 결정적 요인은 바로 금융회사에 대한 평판이다. 고객의 불신을 자극하여 공포를 확산시킴으로써 뱅크런으로 이어질지 여부는 금융회사가 가진 평판 리스크에서 가름된다. '예금을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거래은행에 대한 평판을 일순간에 바꿔버리면서 신뢰 붕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07년 세계경제포럼에선 정보(information)와 전염병(epidemics)의 합성어인 '인포데믹스(Infodemics정보전염병)'라는 말이 키워드로 등장했다. 잘못된 정보나 소문이 인터넷이나 휴대폰으로 급속도로 퍼지면서 근거 없는 공포와 불안을 조성해 정치 경제 등 사회 전반에 위기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특정 금융회사에 대한 왜곡되고 과장된 정보나 부적정한 정부조치가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를 초래하는 것이 뱅크런이라는 점에서 뱅크런은 시장실패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2007년 노던록은행 사태와 이번 우리나라의 저축은행 사태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이번 우리나라 저축은행발 뱅크런에 있어서 평판리스크는 정부가 초래한 사소한 단초가 루머의 진원지가 되면서 뱅크런을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정부실패 사례라 하겠다.

 

이들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언론뿐만 아니라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를 통해 루머가 광속으로 전파되는 시대에 어떤 조그마한 실수가 뱅크런이라는 금융 쓰나미를 만들어내어 어떻게 시장을 엄습할지 예측하기 어려워졌으며, 따라서 예방하기 또한 어렵다는 것이 문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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