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리얼하다
양키들의 표현력..... 배우고 싶다 ㅋㅋㅋㅋㅋ

정보의 효용

1.통제효용:정보는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만큼’ 제공되도록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는 차단의 원칙과 유사한 것으로 통제성격이 있다.

2.형식효용:정보는 정보사용자의 ‘요구에 맞는 형식’에 부합될 때 형식효용이 높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예컨대 전략정보는 정책결정자가 다루는 만큼 중요한 요소만을 축약해 놓는 형태(1면주의)가 보편적이고 전술정보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정책결정자나 실무자에게 제공되므로 전략에 비해 상세하고 구체적인 형태(형식)가 바람직하다.

3.소유효용:정보는 상대적으로 많이 ‘소유’할수록 집적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즉, 글자 그대로 ‘소유’에 초점이 있다. 예컨대 정보를 질과 양적으로 많이 소유한 나라가 상대적으로 적은 나라보다 힘 있는 나라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정보화 시대에 나온 말이다.

4.접근효용:정보는 정보사용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5.시간효용:이는 정보사용자가 ‘정보를 필요로 하는 시점’에 제공될 때 시간효용이 높다는 것으로 적시성과 유사한 개념이다.

[국가보안법 중 예비․음모를 처벌하는 경우]

㉠ 반국가단체구성(제3조)

㉡ 목적수행(제4조)

㉢ 자진지원(제5조 제1항)

㉣ 잠입․탈출(제6조)

㉤ 이적단체구성(제7조 제3항)

㉥ 무기류 등의 편의제공(제9조 제1항)

 미국의 '아틀라스'와 구소련의 R-7

 

인간이 개발한 파괴력이 가장 강하면서도 1945년부터 '힘의 균형'의 역할을 가장 잘 하고 있는 무기체계가 바로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이다.  냉전시대 미국과 구소련은 이 대량살상무기를 목표한 지점에 운반해 주는 가장 효과적인 delivery system, 즉 운반체계를 개발하는데 수십년간 엄청난 국가예산을 쏟아 부어 개발하였으며 현재까지 이러한 체계에 대한 개발은 계속되고 있다.  WMD 운반체계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ICBM(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즉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처음 핵무기의 위력을 맛본 일본에는 ICBM이 아닌 B-29 전략폭격기에 투하된 소형 핵폰탄이 사용되었다.  실질적인 대륙간 탄도탄의 전력화는 1960년 이후에 시작된다.

 

전략미사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의 V2 미사일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실전에 투입되었다.  전략미사일의 실용화는 이후 십여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는데, 이렇게 긴 세월이 소요된 이유는 그 기술적 어려움에 있었다.  사정거리 300km, 최대 속도 마하 6 정도였던 V2를 단순히 확대한다고 해서 사정거리 6,000km 이상, 최대속도 마하 24 이상의 ICBM을 개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핵탄두의 소형화도 개발에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당시에 출현한 핵무기의 크기와 중량이 너무나 컸었기 때문이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은 중량이 4.5t이나 되어서 당시의 가장 큰 폭격기였던 B-29만이 간신히 운반할 수 있었다.  V2의 탄두 중량이 1t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탄두 중량을 몇 배로 늘리고 또한 사정거리를 몇십배로 늘리면 도저히 실용적이지 못한 거대한 미사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미사일의 명중력도 큰 문제였다.  독일이 사용했던 V2 미사일은 그 탄착오차는 사정거리의 무려 4~5% (12~15km)나 되었다.  이 정도 오차를 고려한다면 사정거리 6,000km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의 탄도는 목표에서 200~300km나 빗나간 곳에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핵무기의 파괴력으로 이 오차를 만회하려고 했다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미국의 '아틀라스계획'과 '미사일 갭'  

美 공군이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처음 개발 시작한 것은 제2차 대전 직후인 1945년 10월경이었다.  XM-774라는 암호명으로 명명되었고 1946년 4월에 컨베어社 (현재의 Lockheed Martin Missiles & Space)가 주개발업체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XM-774 계획은 1년 반도 채 지나지 못해 예산상의 문제로 중단되고 만다.  미국은 당시 핵무기와 운반체계를 독점하고 있었으며, 구소련이 당분간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컨베어社는 사업중지에도 불구하고 ICBM의 장래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자비로 연구를 계속하였다.

 

1949년에 구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다음해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제정세는 갑자기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한국에서는 느닷없이 출현한 구소련의 MiG-15가 B-29를 잇따라 격추하여 전략폭격기의 장래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 공군은 1951년 1월 MX-1593이라는 계획명 아래 다시 ICBM의 개발에 나섰으며, 컨베어사를 다시 주개발업체로 지명하였다.  당시의 무거운 핵탄두를 9,000km 이상이나 떨어진 지점에 투하하려면 엄청난 크기인 20t 이상의 로켓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에 그 미사일은 로마신화에 나오는 거인의 이름인 아틀라스(Atlas)라고 불리게 되었다.

 

미국 최초의 ICBM 'Atlas'

 

1955년에 접어들어 아틀라스 계획(Weapon System 107A1)은 국가 최우선 사업의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그 혁신성으로 보나 계획의 규모와 범위로 보나 아틀라스계획은 오늘날의 Missile Defense (MD) 계획에 필적한다고 할 수 있는 규모였다. 

 

아틀라스는 플로리다州 케이프 카나베럴에서 1957년 6월부터 시험발사가 시작되었다.  제1차 테스트에서 아틀라스는 고도 1,000m까지 상승한 후에 통제력을 잃어 공중폭파되었다.  그 후이도 몇번의 실패를 거듭했는데, 1958년 8월까지 발시된 10기 중 5기가 실패할 정도였다.  아틀라스가 지정된 사정거리를 처음으로 완벽하게 비행한 것은 1958년 11월에 실시된 11번째 실험에서였다.  하지만, 이것도 구소련이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발사에 성공했던 1957년 8월에서 1년이나 후의 일이어서 미국은 이미 그들의 최강 경쟁자에게 뒤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같은 해 10월에 구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궤도에 쏘아올려 미국은 큰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는 구소련이 전략미사일 분야에서 훨씬 앞서 있지 않는가 하는 '미사일 갭(Missile Gap)' 논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소련은 독일이 남긴 V2를 연구하는데서 탄도미사일의 개발을 시작했다.  독일의 고급 기술자들이 거의 다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획득할 수 있는 기술이 의외로 적었지만, 코롤로프를 비롯한 구소련의 기술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로켓의 연구에 힘썼기 때문에 독일의 유산이 없어도 대륙간탄도미사일의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코롤로프가 설계한 구소련의 최초의 ICBM은 'R7'으로 불렸다.  서방측에서는 이 미사일에 SS-6이라는 암호명을 붙였다.

 

미국은 핵무기를 소형, 경량화할 수 있는 전망이 보일 때까지 아틀라스의 개발을 미루었지만 구소련은 이미 보유하던 핵무기에 맞춰 R7의 개발을 추진했기 때문에 발사중량이 300t에 달하는 거대하고 복잡한 미사일을 만들었다.

 

R7의 테스트는 1957년 중반부터 중앙아시아에 있는 카자흐스탄공화국의 바이코누르실험장에서 시작되었지만 처음에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발사 직후에 폭발해버리는 등 참담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정치적 효과를 노려 일찌감치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후에도 실제로는 실패가 끊이지 않았다.  R7이 실전에 배치되기 시작한 것은 1959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했던 미국은 필사적으로 아틀라스 개발을 서둘러 1959년 10월에는 실전형 아틀라스를 배치하기에 이르게된다.

 

이렇게 하여 미-소 양국은 1959년부터 ICBM 시대에 돌입했지만 아틀라스나 R7과 같은 제1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에는 무기로서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먼저, 초저온을 유지해야 하는 액체산소를 추진제로 사용했기 때문에 발사 직전이 아니면 추진제를 미사일 탑재 내에 주입할 수 없었다.  위험한 작업인 추진제를 미사일 탄체 내에 주입할 수 없었다.  위험한 추진제 주입을 비롯한 발사준비에 10시간에서 하루 이상이 걸려 긴급한 경우에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또한, 발사대에 세워둔 상태에서 카운트다운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적의 선제공격으로 지상에서 파괴될 위험도 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1세대 ICBM은 무기로서의 수명이 극히 짧았으며 제2세대 ICBM의 등장과 함께 2~3년 후에 제1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후 이 로켓들은 우주개발에서 활로를 찾아 사용되었다.

 

'단추누르기 전쟁의 시대'

 

제2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의 기술적 과제는 발사준비에 필요한 시간의 단축과 방어력의 향상에 있었다.  때문에 미사일에 주입한채 저장할 수 있는 액체추진제, 혹은 미사일에 처음부터 장착되는 고체추진제가 개발되었다.  또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콘크리트와 강철로 견고하게 만든 지하격납고에 수납되게 되었다.

 

원통형의 지하격납고는 곡물을 저장하는 창고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사일로(silo)라고 불린다. 미사일은 사일로 속에서 핵폭발의 충격, 폭푸으 열선, 방사선 등으로부터 보호되며 발사 직전에 사일로의 뚜껑을 열고 사일로의 바닥에서 로켓에 점화하여 발사한다. 

 

미국의 타이탄(Titan)과 미뉴트맨(Minuteman), 소련의 SS-7, SS-8, SS-9와 같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이러한 미사일이다.  특히 고체추진제를 쓴 미뉴트맨은 발사명령을 받은 후 약 30초만에 발사할 수 있다. 


스톡홀름 증후군

73년 스톡홀름에서 일어난 인질사건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질이 범인들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심리현상'을 말한다.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4명의 무장강도가 은행에서 직원들을 인질로 잡고 엿새동안 경찰과 대치한 사건에서 당시 인질들은 초기에는 범인들을 무서워했으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의 본질은 잊어버리고, '인연'을 맺은 인질범들을 옹호하고 이들에 대한 비난에 반감을 갖게 됐다. 당시 인질들은 강도에게 협조까지 하는 병리현상을 보였다. 인질범이 인간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이같은 심리변화를 유발한 것. 인질들은 사건종료후에도 강도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아주 극한 상황에서는 약자가 강자의 논리나 주장에 동화돼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런 이상심리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인질구출작전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리마증후군

납치나 인질사건에서 인질범들이 인질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해하고 감정이입상태에까지 이르러 공격적인 태도가 완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1996년 12월17일 페루 리마의 일본대사관 인질사건에서 유래된 용어. 당시 페루반군들이 일본대사관을 점거하고 400명을 억류하면서 시작돼 1997년 4월23일 장장 126일간 이어져 페루 정부의 강경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인질들과 함께 지냈던 반군들은 점차 인질들에게 동화돼 가족과의 안부편지, 미사 개최, 의약품의류 반입 등을 허용하고 자신들의 신상을 털어놓는 현상을 보였다. 이후 이런 현상을 심리학자들은 리마 증후군이라 부르고 있다.


4(목적수행죄)

5(자진지원, 금품수수죄) , 1항 중 제4조 제1항 제6호 목적수행 선동선전허위사실 날조유포죄 제외

6(잠입탈출죄)

9조 제1(총포탄약무기등 편의제공죄), 3(1항의 미수범), 4(총포탄약무기등 편의제공죄의 예비음모죄)


※ 반국가단체 구성
가입권유(3), 찬양고무죄(7), 회합통신죄(8)는 해당되지 않음

스트라이크의 경우처럼 작업을 완전히 중단하는 것은 아니고 직장에 머물면서 일응 작업에 임하나 조합의 지도·명령에 따라 은밀한 가운데 작업능률을 저하시켜 사용자에 압력을 가하는 쟁의행위의 일종. 구미에서는 위와 같은 쟁의수단(소극적 사보타지) 외에, 이전에는 기계나 제품을 망가뜨 린다거나 상처를 입히는 전술(적극적 사보타지), 사용자의 비밀을 폭로하는 전술[개구(開口)사보타지] 등을 포함하여 사보타지라 불렀으나, 지금은 소극적 사보타지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보타지의 역어인 태업을 이야기할 때에는 소극적 사보타지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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